날씨가 쌀쌀해졌다. 김부장님은 오늘의 메뉴를 부대찌개로 골랐다. 김부장님, 이회계사님, 승민씨, 그리고 민영이 이렇게 4명은 서로 팔짱을 끼고 부대찌개 집으로 들어갔다. 부장님이 메뉴를 시킬 동안 승민씨와 민영이는 숟가락과 컵 등을 세팅했다. 김부장님이 수저를 놓는 민영이의 손을 잡았다.


“이 반지는 정말 볼수록 예쁘다. 참 부러워. 근데 대표님께 인사는 언제 드려요? 많이 궁금해하실 텐데.”


김부장님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12월 초에 인사 오기로 했어요.”


민영이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축하해요. 잘 됐다. 대표님 엄청 좋아하시겠네. 축하해요.”


부장님과, 이회계사님이 환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높여 호들갑스럽게 축하했다.


그때 승민씨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흠흠...... 저...... 이렇게 이야기해서 죄송해요. 저 결혼해요.”


다들 눈이 똥그래졌다. 너무 놀라 바로 축하한다는 말도 못했다. 승민씨가 웃음으로 테이블 위의 침묵을 깼다.


“호호. 놀라셨지요? 어쩌다 보니 만나자마자 결혼하게 돼서. 애인 있다는 말도 못 했어요. 죄송해요. 바로 결혼 소식부터 전해서.”


“아니, 진짜야? 정말 결혼해? 언제? 누구랑?”


김부장님이 파파팍 질문을 쏟아냈다.


“헤헤. 한 달 전에 친구 소개로 만났어요. 만나는 날 사귀고, 일주일 뒤에 우리 집에 인사 오고, 그 담 주에 오빠네 집에 가서 인사드렸어요. 일단 3개월 뒤에 결혼하기로 했고요. 상견례는 최대한 빨리 하려고요.”


“그게 말이 돼? 무슨 일 있어? 혹시 애 생겼어?”


김부장님이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고맙게도 대신해줬다.


“풋!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고, 오빠가 8살이 많아요. 나이가 있으니까 좀 빨리 진행이 되는 것 같아요. 오빠가 일단 정식으로 인사부터 드리고 싶다고 해서, 나는 정말 단순하게 양가에 인사만 올린 거였어요. 그런데 시어머님이 만나자마자 오빠 앞으로 사둔 집 전세가 3개월 뒤에 만기인데, 그때 들어가서 살라고 놓치기 싫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사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뜨악했는데, 오빠가 매일 집에 와서 차분히 설명하고, 표현하고 하니까 친정 부모님도, 저도 마음 가는 데로 하자고 결론 내리게 되었어요.

어차피 결혼할 거 타이밍 맞을 때 하는 거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만난 지 한 달 만에 상견례하게 된 거예요. 하하.”


“우와......”


김부장님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회계사님이 김부장님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제야 김부장님이 정신을 차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김부장님이 놀란 가슴을 쓸어안는 동안 이회계사님이 얼른 축하 덕담을 건넸다.


“축하해요. 자기가 27살인가? 정말 좋을 때네. 좋은 사람일 거야. 승민씨를 알아보다니. 축하해요.”


“축하해. 이렇게 승민씨까지 가는구나. 나보다 먼저 가니 좋아? 호호 노처녀 질투 안 할 테니까 눈치 보지 말고, 할 일 다 하면 바로바로 칼퇴해서 준비해요.”


김부장님도 웃으면서 말했다.


“축하해요. 잘 됐다.”


민영이도 얼른 말했다. 덧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카톡! 하고 민영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점심 맛나게 먹어. 그래도 입시 전보다는 확실히 한가해져서 좋다. 이따 나 일찍 퇴근할 거야. 퇴근하고 만나자.]


현욱이었다.


[좋아.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오기]


[콜]


민영이가 카톡 하는 것을 보고 이회계사님이 말했다.


“애인이야? 자기도 이제 양쪽에 인사드리고 나면, 바로 날 잡는 거 아냐? 완전 두근거리고 바쁘겠다.”


“아직 뭐...... 인사만 하는 거예요. 우린 급할게 없어서 천천히 준비할 거거든요. 날 잡힌 승민씨가 바쁘고 정신없겠지요.”


민영이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민영이의 말이 ‘나이 많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어쩔 수 없이 서두르는 너랑은 다르다’라는 말로 해석한 승민씨가 괜히 삐쭉대며 말했다.


“저도 식장만 알아보면 돼요. 이번 주에 예식장 투어 할 건데, 성수기가 아니라서 준비하는데 무리는 없대요. 참 민영회계사님. 웨공 가입했어요?”


민영이는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아래인 승민씨가 ‘주회계사님’이 아니라 ‘민영회계사’라고 부르는 것이 순간 귀에 거슬렸다. 김부장님이야 상사고 연배도 높으니까 그렇게 부르시는 것인데 언제부턴가 승민씨도 은근슬쩍 왠지 하대하듯 민영회계사님이라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지금에야 저 호칭이 기분이 나쁘게 들리는 것인지 민영이는 머리가 아파왔다. 민영은 이런 속 마음을 숨기고 말했다.


“웨공? 그게 뭔데요?”


“웨딩공부, 결혼 준비의 모든 것이란 카페예요. 정보가 엄청 많아요. 저도 거기서 보고 플래너 계약했거든요. 함 가입해보세요. 나는 정말 준비 기간이 짧은 거구요. 보통은 1년 정도 준비하니까 민영회계사님도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특히 집을 새로 구해야 하면 더더욱 바쁠거구요.”


“네. 정보 고마워요. 가입해볼게요.”


민영이가 형식적으로 말했다.


“근데 뭘 보고 그렇게 결혼을 결심했어? 그래도 뭔가 하트 어택이 있었을 거 아냐.”


“그게... 저는 딱 얼굴 보자마자. 이 사람이랑은 사귄다.라고 생각했구요. 오빠는 결혼한다.라고 생각했대요. 그냥 그렇게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 통해서요. 둘 다 운명인가 보다 생각하고 지금 진행하는 거예요. 정말 아직 성격도 습관도 취미도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그냥 날 보는 눈, 말, 우리 집에 매일 와서 잘 어울리는 것 보면 정말 운명 같을 뿐이에요.”


“어머... 사랑은 운명이란 거구나. 멋지다. 그럼 민영회계사님. 자기는 뭐 보고 결혼할 결심했어?”


“저요? 전... 그냥 날 위해 노력하는 거?”


“노력 어떤 거?”

 

“뭐 담배 끊고, 나 보러 달려오고, 대부분 내가 하자는대로 하고. 게다가 헤어지고 정말 우연히 다시 만났는데, 사람의 순수함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때처럼 지금까지도 날 사랑해주고 그러는 부분이 좋은 거지요.”


“휴... 내 인연은 어디 있냐.”


김 부장님이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지 마요. 나 봐. 갔다 온 것보다는 낫잖아요.”


이 회계사님이 자기를 깎아내리며 김부장님을 위로했다.


“아이고 한 번이라도 갔다 온 게 낫지. 한 번도 못 해본 게 나을까요.”


“못 간 게 낫지. 이혼녀, 돌싱 타이틀이 뭐 좋은 줄 알아요? 애 없어도 돌싱은 쉽지 않아요. 안 그래?”


이 회계사님이 승민씨랑 민영이를 보며 물었다. 민영이가 곤란한 질문에 어버버 하다가 대뜸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요. 빨리 좀 가져다주세요.”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돌아가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민영이 아빠가 계셨다. 그래서 모두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모두 아빠한테 인사했다. 아빠가 사무실용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조만간 사윗감 인사 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김부장님이 웃으면서 인사했다. 아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민영이를 슬쩍 쳐다봤다.


“날짜도 안 잡았는데, 사위는 무슨.”


“어머머, 대표님, 대표님도 딸바보 시구나. 호호호 민영회계사님이 아깝긴 하지요. 제가 잘 못 생각했네요. 축하가 아니라 위로를 해드렸어야 했는데. 호호호. 귀한 따님 아직 누구 줄 마음의 준비가 안돼셨나 봐요. 호호호”


김부장님이 눈알을 굴리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괜히 더 주책 맞게 웃으며 주절거렸다.


“으흠. 그렇지 머, 나 먼저 갑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아빠가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셨다.


“전 화장실 갔다 들어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민영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화장실로 돌아섰다. 뭔가 너무 어색하고 답답해서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남은 세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로 갔다.


5시 30분 현욱에게 카톡이 왔다.


[나 지금 퇴근했어. 내가 사무실 앞으로 갈게.]


민영이는 카톡이 도착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거울을 꺼내 코에 분도 더 바르고 립스틱도 덧 발랐다. 또 커피도 한잔 새로 타서 마셨다. 그리고 시간 맞춰 퇴근하게 일도 마무리했다.


6시 정각이 되었다. 민영이가 현욱에게 카톡을 보냈다.


[어디야?]


[10분 뒤 도착이야. 어디에 있을까?]


[회사 주차장으로 오세요.]


민영이는 컴퓨터를 끄고 핸드폰으로 인터넷 쇼핑도 하고 재미있는 게시물도 보며 노닥였다. 그리고 6시 10분이 되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현욱이의 차는 5분 뒤에 주차장에 들어섰다.


“많이 기다렸어? 바로 앞에서 신호가 걸려서.”


조수석에 타는 민영에게 현욱이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냐, 괜찮아 왔으면 됐지 머.”


“어디 갈까?”


“백화점 가자. 서두르면 한 시간은 쇼핑할 수 있어.”


“백화점? 왜?”


“원래 오빠 가지고 있는 양복 입고 인사 오려고 했잖아.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한 벌 새로 사 입으면 쓸모가 많을 거 같아서. 내가 옷 한 벌 사줄게. 가자. 그리고 빈 손으로 올 수는 없으니까 선물 코너도 둘러서 미리 좀 보면 좋을 거 같아.”


“...... 그래......”


현욱이가 순간 머뭇거렸지만 운전대를 돌렸다.


백화점은 폐점시간이 가까워져서 인지 한산했다. 현욱은 민영이가 시키는대로 옷을 입었다 벗었다. 또 민영이가 가자는대로 지하 매장에 가서 한우니 홍삼이니 하는 것들을 둘러보았다. 민영이가 이게 어때? 저게 어때? 물어보면 ‘난 잘 모르지. 다 좋아 보이네.’라고 대답했다.


백화점 폐점 안내 방송이 나오자. 민영이는 현욱이의 팔을 끼고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빠. 배고파서 그래?”


“내가 뭐......”


“오빠, 하나도 안 즐거워 보여서.”


“아니야 좋아. 너랑 결혼할 건데, 좋지.”


“근데?”


“어?...... 근데...... 옷은 양복 이미 있는데 또 사는 게 부담스러워서. 사실 평소에 양복 안 입잖아. 솔직히 쫌 돈이 아까워.”


“지은이네 결혼 때 입은 거?”


“응, 그거 괜찮지 않아?”


“나쁘지는 않은데......”


소재가 싸구려인 게 맘에 안 든다는 뒷말을 민영이는 꿀떡 삼켰다.


“선물이야 좋은 거 들고 가는 게 맞고, 나도 기쁜 마음으로 고를 건데, 옷은 있는 거 입고 싶어. 지금 상황에 자꾸 돈만 쓰면 안되니까.”


“그러니까 내가 사줄게. 우리 집에 처음으로 인사 오는 건데 기본은 해야 하지 않아?”


“휴... 인사 갈 때 그냥 양복도 아니고 새 옷을 사 입어야 하는 게 기본이야?”


속 마음을 말하고 난 현욱은 민영이의 표정을 보고는 숨을 한 번 쉬고는 다시 말을 했다.


“아냐 아냐. 살게. 옷 한 벌은 살 수 있어. 미안해. 하라는대로 할게.”


“흠... 휴...”


민영이는 숨소리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뱉고는 메뉴판을 봤다.


“밥이나 먹자.”


둘은 밥을 먹고 헤어졌다. 눈치 보며, 시키는 대로만 하는 현욱의 행동에 민영이는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간만에 일찍 들어온 민영이는 엄마가 깎아준 과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민영아, 그 변호사한테 연락 안 왔니? 전화한다고 했는데.”


“어? 안 왔어. 그리고 나 남자친구 데려 온다고 했잖아. 선 안 본다고. 전화와도 솔직하게 남자 친구 있다고 말할 거야.”


“너 그러기만 해봐. 니 남자친구 인사도 안 받을 줄 알아. 우리가 결혼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결정된 것이 없으니까. 한 번만, 한 사람만 만나보라는 건데 그것도 못해? 우리가 원하는 것 안 해주면, 우리도 니가 원하는 거 안 해줄 거야. 그런 줄 알아.”


“아이 참.”


민영이는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일 연속극 아줌마처럼 남자친구 인사드린다는 데도 선 보라고 하는 엄마가 이해도 안 가고 실망스러웠다.


방에 들어온 민영은 핸드폰을 켰다. 네이버나 다음의 메인 화면의 내용들은 모두 봤기에 더 이상 볼만한 것도 없었다.


문득 낮에 승민씨가 말한 웨딩공부라는 카페가 생각났다. 민영이는 검색해서 카페를 찾아내  가입을 했다.


생각보다 많은 회원수와 게시물에 민영이는 깜짝 놀랐다. 민영이는 혹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씩 카페를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혹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결혼 준비 리스트가 들어있는 스케줄러를 다운로드하기도 하고, 드레스 사진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 수다방 게시판에 들어갔다. 몇 개의 글을 읽어보니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여자들이 엄청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화를 내고 애태우고 진상짓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같은 여자지만, 좀 한심해 보였다. 게다가 수많은 시댁 욕에 돈 걱정과 남과의 비교로 우울하다는 글들을 보니 막장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민영이 스스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들을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개의 글들을 읽다가 민영이는 어쩌면 결혼이란 이벤트에 흥분해서 부르르 떠는 여자들에게 본인도 미간을 찌푸리는데, 현욱이도 결혼 준비를 서두르는 민영이를 보며 같은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시댁 관련 글들을 읽다 보니 현욱의 집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워졌다.


묘한 기분에 민영은 덥석 현욱에게 전화를 했다. 현욱이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뭐하고 있었어?”


“그냥, 텔레비전 보고 있었어. 무한도전 재밌다.”


“그래? 그럼 나도 이따 봐야겠다.”


“넌 뭐하고 있었어?”


“음... 나 인터넷에 웨딩 카페 가입해서 둘러보고 있었어. 웨딩공부의 모든 것을 공부하는 카페인데. 사무실 사람이 결혼하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해서.”


“그랬구나. 그래서 뭐 좀 공부했어?”


“그냥 뭐 아직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스드메, 예단 3총사니 뭐니 하는데 뭔 말인지 진짜  알 수가 없어서 공부를 하긴 해야 하나 봐.”


“그래. 즐겁게 해봐. 나한테 시킬 거 있으면 말하고.”


“칫. 나 혼자 하냐? 여기 보니까 남자들도 많던데. 오빠도 가입해서 같이 공부하면 좋을 텐데...... 뭐 됐어. 바쁘고. 남자가 또 쪼잔하게 이런데 들어오는 것도 쫌 그렇긴 하니까. 암튼 근데 나는 오빠네 부모님께 언제 인사드려? 따로따로 인사드려야 하는 거지?”


“우리 집? 잘 모르겠어. 두 분 사이는 좋으니까. 그냥 한 번에 만나도 되고. 아님 점심은 엄마랑, 저녁은 아빠랑 만나도 되고. 우리 부모님이야. 뭐 대충 하면 돼. 신경 쓰지 마. 일단 니네 집에 간 다음에 생각하자.”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오빠 부모님이신데. 우리 집 인사드리고 그 다음 주에 내려가서 인사드리면 되지 않을까? 너무 텀을 길게 잡으면 서운해하실 테니까. 어서 연락드려서 시간 되나 여쭤봐.”


“휴... 우리 집은 다 좋아하실 테니까 걱정 마. 그냥 휴...... 우리 집은 좀 천천히 하면 안 될까? 엄마 아빠 이혼하셔서 뭐든지 복잡해. 그러니까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나가자.

그리고 우리 집은 어차피 이혼까지 한 집안이고, 돈도 없어서 도와주지도 못하고, 반대도 못하고. 그저 감지 덕지 할 거야. 지금도 데면데면 거의 연락도 안 하고 지내고. 그러니까 그냥 결혼식 전에 얼굴 한번 본다 생각해. 가볍게 생각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오빠. 어떻게 부모에 대해 그렇게 말해?”


민영이는 처음 보는 현욱의 모습에 놀라서 말했다. 부모에 대한 태도가 무례해서 굉장히 없어 보여 싫었다.


“휴...... 나도 내 부모 일 년에 한두 번 밖에 안 봐. 서로 돈도 없고, 바빠서 만나고 자시고가 없어. 그냥 서로 피해만 주지 말자 주의야. 정말인데. 결혼 전에 얼굴 한 번 보고, 결혼식에서 보고, 그 다음에는 설날, 추석 이렇게 두 번 정도만 만날 거야. 따로 연락할 일도 없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미안한데 내가 그런 형편이야.”


민영이는 처음으로 들은 현욱의 가족 이야기와 함께 냉정한 현욱의 모습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부몬데... 결혼하면 좀 달라져야지. 좀 더 연락하고, 찾아뵙고, 자식으로 기본은 해야지.”


“기본? 달라져야 한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더 멀어지면 멀어져야지. 가까이 했다가 돈이라도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현욱이의 냉소적인 말에 민영이는 정말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우리 집에 인사하고 그러는 거는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 넌 니네 집이나 신경 써. 니가 하라는대로 할 테니까. 전화 끊자. 나 무한도전 보던 거 봐야 해.”


현욱이가 전화를 끊었다. 민영이는 뻘쭘하고 민망하고 속상해서 핸드폰을 잡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카톡을 했다.


[오빠. 미안해. 내가 주제넘은 소리 했나 봐. 미안해]


한 참 뒤, 현욱에게 전화가 왔다.


“민영아. 니가 뭐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이런 집안에 끌어들여서 정말 미안해. 보여줄수록 내가 너무 없어서 미안해. 암튼 너 신경 안 쓰도록 내가 다 커버할 테니까 그거는 믿어줘.”


“그럼 오빠 믿지. 오빠 너무 걱정마요. 미안해요.”


민영이가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다. 이젠 정말 자야겠어.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응. 오빠도 잘 자.”


민영은 전화를 끊었다.


민영은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 핸드폰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이 답답했다. 거실로 나가 큰 화면으로 무한도전이나 미국 드라마나 아니면 최신 판타지 영화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저 텔레비전은 내 것이 아니었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고, 이 방도 내 것이 아니구나. 부모님 것이구나. 내 맘대로 할 수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영이는 방을 둘러보았다. 베란다까지 달려있는 있는 방은 더블 침대, 화장대. 붙박이장에 커다란 책상과 작은 소파까지 넉넉히 들어올 만큼 널찍했다. 생각해보니 현욱의 집보다 민영의 방이 넓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민영이는 지금 당장 현욱에게 가고 싶었다. 마음껏 벌거벗고 다닐 수 있고, 내가 보고 싶은 드라마를 볼 수 있고, 내가 먹고 싶은 거 시켜먹을 수 있는 현욱이네 집이 더 편하고 내 집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갈 수 없었다. 거기도 아직은 내 집이 아니었으니까.


민영이는 다시 웨공 카페에 접속했다. 혼수, 예단 등 하나씩 진지하게 분석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민영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대충 계획이 나왔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봄에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영이는 글쓰기를 클릭했다.






제목 : 제 결혼계획 좀 봐주세요.(초초 간소화 결혼)    


본문 


정말 초 절약해서 결혼하려고요. 예산이 많지 않거든요. 총예산이 5천만 원이에요. 그래서 간소하게 해야 해요. 둘 다 전문직이니까 작게 시작해서 열심히 모아 부자 되려고요.

일단 4천만 원 보증금으로 원룸 월세하고 

결혼식 예식장만 메이크업이랑 드레스 세트로 해서 5백 정도 넉넉히 잡구요 (축의금으로 사실 해결 가능할 것 같아요.)

신혼여행 제주도 100만 원 하구요.

상견례 30만 원

신랑 반지 100만 원 (제 반지는 프러포즈 반지 있으니까 생략하구요)

양가 부모님께 각 100만 원씩 예단이나 이런 것 대신드리고요.

이렇게 결혼할까 해요.

이렇게 하신 분도 계시지요?

복잡하게 안 하고 좋지 않을까요?

참고로 저는 꾸미는 것도 안 좋아하고, 사진 안 찍어도 돼요. 예비 시부모님이 이혼하셔서 터치도 없으실거구요.

사실 우리 집은 좀 형식도 따지고 이렇게 하면 속상해하실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제가 잘 설득할 수 있어요.


사실 남친이 2천만 원만 더 모으고 결혼하자고 하지만 제가 못 기다리겠어요 ^^. 제 나이도 곧 30살이 되니까요. 2천만 원 더 모으나 안 모으니 대단한 금액도 아니고요.


돈이야 

젊을 때 결혼해서 열심히 모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할 수 있겠지요?




핸드폰이 징징 거리며 꿈틀댔다. 민영이가 올린 글에 댓글이 달렸다는 알람이었다. 민영이는 칭찬받을 생각에 두근대며 카페에 접속했다.


몇 분 사이에 댓글이 4개가 달려있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댓글들은 민영이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민영이는 댓글에 일일이 답 댓글로 반박하기 시작했다.




댓글 1 : 글쓴이님 참 순진하시네요. 결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이혼했다고 시어머니가 시짜노릇 안 한다는 것은 님 생각이에요. 어린애 생일 파티하듯 결정할 게 아니에요. 일단 시어머니 말씀과 친정 엄마 말씀부터 들어보세요.


↳ 민영 : ㅎㅎ 지적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 남친이 이미 시댁과 그닥 자주 만나지 않아요. 일 년에 한번 만난데요. 괜찮아요.


댓글 2 : 님 친정 부모님께 일단 말해보세요. 결혼하면 안 그래도 친정부모님 가슴에 대못박을 일 많은데 시작부터 그렇게 시작하면 평생 후회해요.


↳ 민영 : 결혼해서 잘 살면 좋아하지 않으세요? 왜 결혼하면 다들 친정 부모님께 미안하다고 할까요? 정말 결혼하면 다 불행해지나요? 전 안 그럴 자신 있거든요. 친정 부모님도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댓글 4 : ㅋㅋㅋ  누군들 님처럼 생각 안 했겠어요? 허례허식이라고 다 버릴 거면 결혼을 왜 해요. 동거하지. 다들 이것저것 준비하는 이유가 있답니다. 좀 더 공부하셔야겠네요.


↳ 민영 : 안 그래도 정말 궁금해요. 주변에서 보면 다 간단하게 하고 싶다 결혼 준비 힘들다 하면서 왜 다 하는지요. 그냥 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건데. 내 결혼이잖아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밥 한 끼 먹고, 혼인신고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 것도 있어요. 단지, 친정 부모님을 위해서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려는 것뿐이에요.




댓글을 일일 달면서 민영이는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가. 왜 내가 이 사람들에게 변명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났다. 게다가 답 댓글 몇 개 다는 동안에  또 다른 댓글이 순식간에 몇십 개가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민영이를 비난하고 가르치려 드는 댓글들이었다. 민영이는 답 댓글 다는 것을 멈추고 화면을 닫았다. 그리고 괜히 디엠비로 텔레비전을 봤다. 그러나 계속 푸시 알람이 울리는 통에 텔레비전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민영이는 다시 게시판에 들어가서 댓글들을 읽었다. 몇십 개의 댓글 중에 두어 개만 응원해주는 동감하는 댓들이었고 대부분은 일단 남친과 가족이랑 이야기를 해라, 글쓴이가 너무 단순하고 뭘 모르는 어린애다, 남자가 일부러 어그로 끄는 것 같다. 진짜 결혼 준비해보면 생각이 바뀔 거다. 아직 상견례도 안 해서 저러는 거다 라는 등등의 부정적인 댓글들뿐이었다.


민영은 입을 꾹 닫고 하나씩 댓글을 차분히 읽었다.




댓글 55 : 글쓴이님 참 순진하신가 봐요. 근데요. 남친이 먼저 그렇게 하자고 한건가요? 원문에 보니까 남친이 돈 더 모으자고 했더라구요. 제가 느끼기에는 남친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남자도. 결혼에 대해 환상이 있어요. 대화를 해보세요. 결혼은 신부만의 것이 아니에요. 일단은 신랑 신부의 것이고, 넓게는 양가 부모님의 진행이기도 해요. 앞으로 몇십 년을 함께 살 건데 첫 단추를 싸우면서 설득하면서 힘들게 시작할 필요 없어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말이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에요. 일단은요.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생일대의 이벤트예요. 님 혼자만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민영이는 여러 번 그 댓글을 읽었다. 그리고 민영이는 글을 삭제하고 카페 가입을 탈퇴했다.






“이모, 순댓국 2인분이요.”


순댓국 집에 들어서면서 현욱이가 소리쳤다.


현욱이와 민영이는 문가의 식탁에 앉았다. 퇴근하고 둘이 저녁을 먹으러 들어온 길이었다.


식탁에 앉자마자 민영이는 종이를 내밀었다.


“오빠. 이게 내 계획이야. 간단하게 결혼하는 계획 한 번 봐봐.”


종이에는 어젯밤 웨딩카페에 올렸던 계획이 간단하게 적혀있었다. 현욱이가 쭉 훑어보았다.


“여기에 혼수는 없는데. 어차피 최대한 빌트인으로 할 거고, 또 오빠가 가지고 있는 것들 그대로 가져갈 거라 혼수는 살게 없는 것 같아서 안 적었어. 숟가락 1개, 그릇 1개, 프라이팬 1개 정도만 사면 될 거 같은데. 그런 건 그냥 아무 데나 가서 사면 되니까.”


“그래.”


현욱이는 종이를 다시 민영이에게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는 표정이었다. 민영이는 상사에게 결재 서류를 퇴짜 받은 기분이었다.


“왜 그래?”


“뭐?”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게 어딨어. 뭐 하는 것도 없는데. 그리고 나야 니가 하자는대로 하면 되잖아.”


“그래, 다음 주에 인사 올 때 양복 하나 사고, 선물은 백화점에서 꽃 바구니랑, 홍삼세트랑 화과자 세트 이렇게 사자. 어때?”


“좋아.”


주저하지 않고 바로 좋다고 대답하는 현욱에게 민영은 섭섭함을 느꼈다. 생각도 감흥도 아무것도 없는 로봇 같았기 때문이다.


민영이는 한숨을 쉬며 종이를 접어 백에 넣었다.


“휴...... 오빠. 오빠는 나랑 결혼하고 싶어?”


“그럼.”


“왜?”


“사랑하니까.”


현욱이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미리 나온 깍두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오빠. 나 좀 봐.”


현욱이가 고개를 들었다.


“오빠. 2천만 원만 있으면 신나고 자신감 넘치게 결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정말 2천만 원만 모으면 오빠가 먼저 나서서 결혼 준비하고 웃으면서 나 데려갈 수 있을 것 같냐고.”


“왜...... 그래. 무섭게.”


현욱이가 민영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제 게시판에 이 계획을 올렸는데. 다들 내가 뭘 모른데. 특히 신랑과 상의도 안 한 것 같다고, 그러면 안된다고. 이기적이 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었어. 그래서 정말 내가 이기적인가 싶어서.”


현욱이가 민영이 눈치를 보며 물 잔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오빠가 정말 지금이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면 미뤄야지. 인사도 천천히 오고. 내가 기다리는 게 맞는 거 같아.”


현욱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민영이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난... 너랑 결혼할 거야. 널 사랑해. 그래서 자존심도 버리고, 니가 하자는 데로 다 할 수 있어.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니가 기다려 줄 수 있다면 딱 1년만 기다려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긴 해. 1년이면 2천만 원 정도 모을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좀 당당해지지 않을까 싶어. 적어도 결혼식장 밥값으로 고민하지는 않고 싶어서 그래.”


민영이는 작게 끄덕끄덕을 여러 번 했다. 그때 순댓국이 나왔다.


“소주 시키자.”


민영이가 말했다.


“그래. 이모! 여기 소주 한병이요.”


현욱이가 소주를 민영이에게 한잔 따라줬다. 민영이가 원샷했다.


“딱 1년이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그리고 휴... 집에서 선 보라고 할지도 몰라. 솔직히 지금도 딴 사람 만나보기만 하라고 말하고 계시거든.”


“난 널 믿으니까. 니가 알아서 해.”


현욱이가 아무렇지 않게 소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민영이가 소주잔을 물끄러미 보더니 또 원샷을 했다. 현욱이가 생기 돋는 표정으로 민영이를 바라보았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현욱이가 말했다.


“됐어. 나는 벌써 29살이 되는 거지만. 오빠는 아직 31살이 되는 것뿐이니까. 밥이나 먹자. 여기 순댓국 맛있어.”


“그래. 먹자. 이거 먹고 우리 여의도 갈까? 63 빌딩 꼭대기에 근사한 바가 있데. 수학샘이 그러는데 좀 비싸지만 정말 가볼만하다고 하더라.”


민영이는 그 돈부터 모아서 결혼 준비나 하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하지만 참았다. 어떻게든 나름 민영이를 위로해주려고 하는 현욱이의 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됐어. 그런데 갈 기분은 아니야. 어디 가서 맥주나 좀 마시자.”


“그럴래? 그럼 수제 맥주? 그런데 갈까?”


“됐어. 그냥 쪼끼쪼끼 같은 데나 가자.”


그날 민영이는 꽤 많은 술을 먹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술을 마실수록 민영이는 말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시면서 맛있다고 오늘따라 술이 달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다음날 새벽 민영이는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서 구토를 했다. 소주 냄새. 맥주 냄새. 위산에 녹은 안주 냄새가 화장실을 가득 채웠다. 민영이는 쉬도 마렵고 똥도 마려웠다. 급한대로 변기에 앉아 힘을 주자 아래로 위로 동시에 와르르 먹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영이는 그렇게 설사와 구토를 동시에 했다.


다 쏟아내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들었다. 멍하니 있던 민영이는 변기 물도 내리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샤워까지 해버리면서 정신을 차렸다.


5시 30분이었다. 모두가 자고 있었다. 민영이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잠깐 뒤, 엄마가 민영이를 깨웠다.


“민영아, 너 뭐야? 술 마셨어? 술냄새가 너무 난다.”


“네.”


“네? 이것 봐라. 너 미쳤니?”


“괜찮아요.”


“어이고, 이게 뭔 일이래. 술 처먹고 아침까지 헤롱 대고 있고. 아빠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에휴. 일단 북엇국 끓여줄 테니까 정신 좀 차리고 있어.”


민영이는 아빠가 일어나 나올 때까지 그렇게 거실 소파에 누워있었다.


“여보, 민영아 밥 먹어요.”


엄마가 불렀다. 아빠가 식탁에 앉고 민영이도 천천히 기어가듯 부엌에 가서 앉았다.


뜨듯한 국물이 위장을 쓸어내렸다.


민영이는 밥을 천천히 먹으며 아빠가 진지를 다 드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말을 했다.


“아빠. 엄마. 저 남자친구 이번에 인사 못 올 거 같아요.”


“뭐? 왜? 그렇게 데려온다고 하더니 왜?”


엄마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그냥, 지금은 아닌 거 같아서요.”


“지금은 아니라고? 그런 게 어딨어. 오기로 하고 안 왔으면 헤어진 거지. 잘 했어. 잘 됐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나도 일 한지 얼마 안 됐고, 오빠도 지금 입시 때문에 정신도 없고, 특히 얼마 전에 오빠 제자가 자살하면서 오빠가 너무 힘들어하고 그랬거든요. 아무튼 조금만 미룰게요.”


“흥! 그따위 걸로 중요한 약속을 미루다니 좀 별로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좀 객관적으로 잘 생각하고 판단하면 되겠구나.”


“엄마! 사람을 왜 그렇게 무조건 삐딱하게만 보세요.”


“내가 뭘.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니가 헤어지자고 하면 되겠네. 어머나. 너 설마 그것 때문에 술 처먹은 거야? 그놈이 너 술 먹게 만들었니? 못된 놈.”


“으흠!”


그러자 아빠가 갑자기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둘 다 그만해. 미룬다니 알았다. 알아서 해라. 하나도 급할 거 없다. 여보 당신은 국이나 더 떠 줘. 시원한 게 맛있구먼. 그리고 너 술 많이 취해서 힘들면 오늘은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라. 걱정 말고 푹 쉬어. 휴가도 써도 되니 신경 쓰지 말고.”


아빠가 엄마를 막았다. 민영이는 아빠가 살짝 웃는 것을 봤다. 민영이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일어났다.


“네, 그럼 오늘 하루만 좀 쉴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영이의 뒤통수에 대고 엄마가 말했다.


“그 변호사가 해외 출장 가느라고 연락을 못했대. 며칠 안에 들어온다니까 그때 전화 잘 받아.”


민영이는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바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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