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아, 우리 다 나간다. 미역국이랑 밥 먹어.”


“외출할 거야. 안 먹어.”


민영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던지.”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민영이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11시밖에 안됐다. 언니가 똑똑 문을 노크했다. 민영이는 짜증 나고 귀찮아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언니가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더니 자는 민영이를 보고 문을 살그머니 닫았다. 문 밖에서 언니가 예린이한테 ‘이모 자니까 그냥 가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영이는 눈을 계속 감았다. 어차피 시간은 넉넉했다. 그리고 진짜 잠이 들었다.






“민영아.”


“오빠.”


“잤어?”


“아니. 안 잤어. 끝났어?”


“아니. 일찍 안 끝날 거 같아. 애들이 시험을 못 봐서 비상이야. 암튼 빨라야 7시? 학부모가 6시에 온다고 했는데 7시엔 끝날 것 같긴 한데...... 근데 아무튼 지금은 아무 약속을 할 수가 없네. 이따 다 끝나고 연락할게. 추우니까 학원 앞에서 기다리거나 하지 말고 집에 편하게 있어. 너도 바쁘고 힘들었잖아. 알았지?”


“응...... 알았어. 걱정 마.”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전화를 끊었다. 민영이는 잠시 누워있었지만 곧 몸을 일으켰다. 헤어롤을 머리카락에 붙인 채로 잠을 자서 목이 아팠다. 민영이는 헤어롤을 푸르고 머리를 매만졌다. 세팅된 헤어와 풀 메이크업이 입고 있는 츄리닝과 어색했다.


괜히 마스카라를 한 번 더 칠했다. 얼굴은 예뻤다. 새로 산 코트를 입고 나가면,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면서 완벽하게 예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영이는 잠옷 바지를 추켜올리며 거실로 나가 텔레비전을 켰다. 무한도전 재방송을 찾으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민영이는 핸드폰으로 맥도널드 햄버거를 주문해서 먹었다.


햄버거를 먹고, 쿠션을 끌어안고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채 민영이는 또 잠이 들었다. 삐삐삑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아빠였다. 민영이가 눈을 뜨고 거실 벽의 시계를 봤다. 저녁 8시였다.


“어. 안 나갔어?”


“나갔다가 일찍 왔어요.”


민영이가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


“그래? 이건 뭐냐? 햄버거 사 먹었어?”


“집에 오는 길에 맛나 보여서 사가지고 와서 먹었어.”


민영이가 또 거짓말을 했다.


“먹었으면 치워야지.”


“아 몰라.”


민영이는 괜히 적반하장으로 짜증을 내며 방에 들어갔다.


“저거 요즘 왜 저래? 벌써 노처녀 히스테리야?”


“그만둬요. 요즘 회사일 많아서 힘들어 보이던데. 어제도 9시에나 집에 왔잖아요. 당신이 너무 일을 많이 줘서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그게 뭐가 많아? 파견 나가면 10시, 11시까지는 기본으로 일해야 해. 내 딸이라고, 얼마나 오냐오냐 해주는데. 저거 저거 엉뚱한 놈이랑 연애질이나 하느라고 저러지. 아주 그냥 내가 애를 잘못 키웠어. 당신은 집에서 애 하나 제대로 못 기르고 뭐하는 거야?”


“왜 나한테 그래요? 내가 뭘 어쨌다고. 암튼 이번에 선도 본다니까 화내지 말고 기다려봐요. 애가 체력이 약해서 힘들어서 저래요. 보약이라도 먹여야 하나.”


민영이는 방에서 엄마 아빠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집이 넓어서 보통은 이렇게 대화가 잘 들리지 않는데, 오늘따라 귀에 쏙쏙 들리는 이유가 엄마 아빠가 더 크게 말해서인지, 자격지심에 민영이가 귀를 쫑긋거리고 엿 들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민영이는 짜증이 확 났다. 민영이는 결국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어디가?”


“바람 쐬고 올게요.”


“나갔다가 들어왔다면서 또 어디 가?”


“약속 있어요.”


“오밤중에 나가서 뭐 하려고!”


아빠가 버럭 하자 엄마가 아빠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너무 늦지 말고, 일찍 들어와.”


“그럴 거예요.”


민영이가 퉁명스럽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민영이는 차를 끌고 무작정 현욱이네 집으로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데가 여기밖에 없었다.


몇 주 만에 와본 현욱이네 집은 지저분했다. 컵라면과 편의점 도시락 껍질이 쌓여있었고, 책도 여기저기, 벗어놓은 속옷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민영이는 잠바도 벗지 않고 청소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책 몇 권을 치우고 나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내 방 청소도 안 하는 주제에, 남자친구 방청소를 자발적으로 하는 본인이 왠지 한심했다.


민영이는 지저분한 방을 내버려두고, 잠바를 입은 채 2층의 침대로 가서 누웠다.


민영이는 현욱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


“어! 민영아. 미안해. 근데 나 지금 상담 중이라서 내가 상담 끝나면 전화할게.”


민영이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현욱이는 본인이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민영이는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현욱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드라마의 철없는 여주인공처럼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하며 투정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현욱에게 내쳐진 듯 한 기분에 우울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운 채, 민영이는 핸드폰으로 DMB를 켰다. 주말 드라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연이어 개그콘서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개그 콘서트의 마지막 코너가 시작되었을 때 현욱이가 왔다.


“왜 집에 왔어?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나보고 니네 집 앞으로 오라고 하지. 추운데 고생하지 말고.”


현욱이가 민영이 옆에 누우며 말했다.


“그냥. 답답해서. 많이 피곤해?”


민영이가 현욱이 품에 안기면서 말했다. 현욱이가 민영이를 꼭 안더니, 습관적으로 민영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둘둘 감으며 장난을 쳤다.


“피곤하지. 면접 준비니. 입시 상담이니. 과외할 때 내 맘대로 하던 거랑은 다르니까 좀 짜증이 나지. 다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회의나 하고, 일은 다 나한테 넘기고 정말 집단이란 것은 나랑 너무 안 맞는 것 같아. 스트레스만 주고. 애들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하고.”


“그게 다 오빠가 능력자니까 그런 거잖아.”


“좋게 보면 그런 건데. 나쁘게 보면, 내가 제일 싸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 아무튼 지금은 경력 생각해서 하는 것도 있고, 암튼 문제는 이번에 성적들이 별로라 논술이랑 면접이 관건이 됐어. 원래 정시만 준비하던 애들도 발등에 불 떨어지고. 그래서 더 어깨가 무거워.”


“더 바빠진 거야? 그럼 우리 집에는 언제 인사와?”


현욱이가 민영이 머리를 만지던 손을 멈췄다.


“휴~. 민영아. 이런 이야기 지금 해서 미안한데. 우리 인사 천천히 드리면 안 될까?”


민영이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무슨 말이야?”


현욱이도 몸을 일으켰다.


“일단 수능 끝나도 입시가 다 끝나는 1월 말까지는 이런 식으로 계속 바빠. 일단 12월까지는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 없어.”


“그러니까, 빨리 인사 와야지. 11월에 인사하고 12월에 날짜 잡고. 1월부터 한가해지면 결혼 준비해서 5월에 다시 입시 시작하기 전에 식을 올리는 게 계획 아니었어? 오빠 말대로라면 한가해질 때 내년 봄에 인사드리자는 건데. 그러면 준비하고 뭐하면 내 후년 봄에나 결혼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럼 너무 늦잖아.”


“......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지금 상황에서는 내년 결혼이 힘들 거 같아. 사실 내 나이도 이제 겨우 서른이야. 너무 어리고, 준비도 안됐고. 너랑 결혼은 정말 빨리 하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어려. 한창 일에 매진해야 할 시기이고. 일이 년만 시간을 주면. 더 바싹 모아서 2천만 원이라도 만들어야 내가 당당히 인사드리고 결혼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뭐?!”


민영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나는? 나는 한 달 뒤면 29살인데? 내 나이는 생각 안 해? 내가 애인도 있는데 왜?! 서른 넘어서 결혼해야 하는데?”


“미안해. 내가 준비가 안돼서 그래. 일단 내가 한 2천만 원이라도 모으면 좀 나을 것 같아.”


“일이 년 기다리면 2천만 원은 모을 수 있어? 한 달에 50만 원 저금한다면서 그걸로 어떻게 2천만 원 만들 건데?”


“일단 이사 갈 거야. 여기보다 더 허름하고 보증금 싼 월세로 가고, 그리고 차를 팔까 싶어. 지금 팔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돈이 남을 거야. 그리고 이번 입시 끝나면 학원 몰래 과외를 하던지, 아님 아예 여기보다 더 급여 많이 주는 데로 옮기던지. 아니면 파트로 2개 뛰고, 과외 병행해서 최대한 수익을 높일 수도 있고. 아무튼 뭐라도 해야지.”


“휴...... 모르겠다. 그렇게 해야 해? 그냥 내가 모은 돈으로 하고, 없이 시작하면 되잖아. 그리고 결혼하면 둘이 버니까 더 팍팍 모을 수 있잖아. 왜 굳이 식을 미루면서까지 꼴랑 일이천을 모으려고 하는 거야? 결혼식이야 어차피 축의금 받는 걸로 되는 거잖아. 혼수니, 예단이나 그런 것들 다 안 하면 되고. 내가 괜찮다고. 일단 같이 살면서 모으자. 내가 앞으로 같이 벌어서 오빠 학원도 차려주고 할게. 뭐가 문제야.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고집이 아니라......”


“그럼 자존심이야? 그렇게 자존심 세워야 해? 날 위해서 자존심을 버리지는 못해? 날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다면서? 보통은 여자가 이렇게 말해주면 고맙다고 하면서 안아주고 더 사랑하고 그러는데 오빠는 왜? 도망가려고 그래? 뭐가 문제야? 결혼이 하고 싶기는 해?”


현욱이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이불 끝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민영이는 씩씩 거친 숨을 몰아 대다가 고개를 쭈그리고 있는 현욱을 보고는 눈물을 확 쏟았다.


“난 다른 사람 보지도 않아. 오빠만 봐. 그런데 오빠는 왜 다른 사람을 생각해? 나 사랑하는 거 아니야? 잡고 싶은 거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다는데 내가 하자는데 왜 뭐가 문제야?”


“...... 미안해.”


현욱이가 주저하며 민영이를 안았다.


“오빠, 나 놓지 마. 응? 나 잡아. 제발. 나 오빠 사랑한다 말이야.”


민영이가 울자 현욱이도 훌쩍거렸다. 지금 고집 부리다간 민영이를 놓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민영이를 잡아야 했다. 현욱이가 민영이를 꼭 안으며 말했다.


“알았어. 당장 바쁜 거만 끝나면 12월 첫째 주에 인사 갈게. 미안해. 내가 못나서 미안해.”


현욱이가 말했다.


“결국 내 말대로 할 거를, 왜 날 아프게 해. 엉엉.”


민영이도 훌쩍이며 현욱이를 안으며 말했다.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민영이 핸드폰이었다.


“엄마?”


민영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코맹맹이 소리를 감추려고 애쓰며 전화를 받았다.


“몇 신데 안 들어와? 어디야?”


엄마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있었다.


“어... 집 근처야.”


“술 먹어? 내일 출근할 애가 지금 이 시간까지 뭐하는 거야? 제정신이야? 그놈이랑 같이 있어? 그놈은 뭐하는 놈이길래 밤늦게까지 집에도 안 들여보내는 거야? 그놈 좀 바꿔봐.”


“아니야. 친구랑 있어.”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지금 막 내 차에 들어와서 그래. 아무튼 30분 내로 들어갈 거니까 주무세요. 술 안 먹었어요.”


민영이는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오빠. 일단 나 집에 갈게.”


“데려다줄게.”


“아냐. 됐어. 잠이나 자요. 아무튼 그럼 2주 뒤에 만나는 걸로 부모님께 말씀드릴게. 우리 집은 걱정 마. 오빠는 나만 잡으면 돼. 2주 뒤에 인사 오는 거 맞지?”


민영이가 코를 팽 풀고 말했다.


"응, 민영아,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도 말해야지.”


“사랑해. 민영아. 사랑해.”


현욱이도 코를 풀면서 말했다. 민영이와 현욱은 꼭 끌어안고 다시 엉엉 울었다.


월요일 아침 7시 알람에 민영이가 눈을 번쩍 떴다. 민영이는 알람을 끄고 거실로 나갔다. 부모님이 아침식사를 하고 계셨다.


민영이가 식탁에 앉았다. 엄마가 말했다.


“밥 줄까?”


“아니요. 선식만 마시면 돼요. 그건 그렇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12월 첫째 주 일요일에 남자친구 데려올게요. 

2주 뒤예요. 괜찮지요?”


아빠가 대답 대신 흐음 하고 헛기침을 하며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밥을 한 숟갈 입에 넣으셨다. 순간 식탁에 침묵이 돌았다. 민영이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왜요? 인사도 안 받을 거예요? 엄마 아빠도 보시면 마음 바뀌실 거예요. 괜찮은 사람이에요. 데려오면 만나주신다고 했잖아요.”


“사람이야 괜찮겠지. 감옥에 있는 사기꾼도, 거렁뱅이도 알고 보면 사람은 다 괜찮다.”


“아빠!”


민영이가 큰소리를 냈다.


“얘! 아삐한테 뭔 버릇이야! 조용히 해! 알았어. 데려오면 만나 줄게. 아무튼 이모가 주선한 사람 전화 가면 예의 바르게 받아. 그것만 해. 알았지?”


민영이는 대답도 안 하고 선식을 쭉 마셨다. 아빠도 엄마도 아무 일도 없는 듯 계속 식사를 하셨다. 민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핸드혼을 꺼내 카카오톡을 했다.


[오빠. 부모님께 2주 뒤에 인사 온다고 말씀드렸어.]


[잘했어]


바로 대답이 왔다. 민영이가 좋아라 웃으며 현욱에게 전화를 했다.


“안 잤어?”


“응, 그냥 밤샜어.”


“왜?”


“그냥, 공부할게 있어서 그랬어. 아무튼 잘했어. 이제 내가 뭘 할지 알려줘.”


“뭐, 일단 양복은 있으니까. 머리 자르고, 인사 올 때 들고 올 선물 생각해야지.”


“그래. 알았어. 출근 잘해.”


“오빠, 오늘 퇴근할 때 만날까?”


“시간 되면 보면 좋지.”


“오빠. 사랑해용. 홍홍홍.”


“나도. 나 한 시간만 자고 출근해야 할 것 같아. 이제 그만 잘게.”


“응. 깨워줄까?”


“아냐. 알람 맞출게. 즐겁게 일하고 이따가 연락해.”


전화를 끊었다. 민영이는 이유 없이 기분이 씁쓸했다. 인사도 오기로 했고, 이제 비로소 결혼 준비가 시작되는 것인데 왜 찝찝한지 알 수가 없었다.


민영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수록 운동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게다가 곧 웨딩드레스도 입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민영이는 운동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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