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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이가 부스스 눈을 떴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핸드폰을 보니 아침 9시였다. 민영이는 울리지도 않은 핸드폰 알람을 껐다. 현욱은 아직도 깊이 잠에 빠져있었다. 민영이는 현욱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욱의 얼굴에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민영이는 살며시 일어나 커튼을 쳐서 현욱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민영이는 시험에 합격했을 뿐, 돈 관리도 안 하고 모두 부모님이 알아서 해주는 어린애 같은 자신에 비해 혼자서도 공부하면서 계획을 세워서 살아가는 현욱이가 멋있고 듬직한 어른 같아 보였다. 그동안은 나이가 많으니 오빠라고 불렀을 뿐, 사실 동기이자 친구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현욱이를 진짜 오빠로 대우해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러 나왔다.


외모 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 없다고 다들 그랬지만, 아니었다. 현욱은 생각보다 더 의젓하고, 야망 있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민영은 ‘내가 보는 눈이 있었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랑 사귀었고, 지금 다시 만나길 잘 했다.’라고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현욱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눈도 뜨지 않고 손을 뻗어 민영이를 잡아 끌어안았다.


“일어났으면 내 품속으로 와야지 왜 떨어져 있어?”


현욱이는 레슬링을 하듯 두 팔과 다리로 민영이를 꼭 안으며 말했다.


“호호 뭐야 이거 레슬링 하자는 거야? 그만 풀어 줘 답답해.”


민영이가 엄살을 부리며 말했다.


“이젠 안 놔줄 건데. 으흐흐흐 가만히 있어.”


“아이고 답답해라. 그만해. 이제 일어나요. 날씨 완전 좋아. 덥긴 한데 그래도 여기저기 구경하기 좋은 날씨예요. 얼른 나가서 산책도 하고 아침도 먹자. 응?”


“그래, 그러자. 그 전에 뽀뽀부터 하구.”


현욱은 민영이의 정수리에 뽀뽀를 하더니 민영이가 으스러지도록 꼭 안았다.


“호호호 알았어. 자! 얼른 씻자. 벌써 9시예요. 서둘러요.”


“뭐가 그렇게 급해?”


“급하지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항구도 가고, 시장도 가고, 할 것도, 갈 데도 많잖아.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

데.”


“에헤 그 전에 한 번 하고 나가야지. 으흐흐흐흐.”


현욱이가 민영이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말했다.


“깔깔깔. 근데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 섹스는 서울 가서 해도 되잖아. 지금은 나가야 돼. 얼마만의 여행인데.”


민영이가 현욱이를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현욱이는 아쉬움에 입을 쩝쩝 다시며 ‘추워’ 하며 다시 이불을 덮었다. 그러자 민영이가 도로 이불을 걷었다. 그래도 현욱이는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으이구, 알았어. 나 먼저 씻고 나올 테니까 그다음에 씻어. 나가서 밥도 먹고 계획대로 바람 쐬자. 벌써 10분 늦었어.”


민영이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현욱은 발가락으로 이불을 끌어당겨서 몸에 덮었다. 오랜만에 출근 생각하지 않고 늦잠을 자는 거라 좀 더 느긋해지고 싶었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주말에도 민영이와 만나느라 집에서 쉬는 날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피곤했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30분은 더 잘 수 있겠지.’


하지만 민영이는 5분 만에 씻고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을 걷으며 현욱이를 깨웠다.


“아이. 정말 민영아 나 피곤한데 더 쉬면 안 돼?”


“오빠가 뭐가 피곤해? 어제 운전도 내가 더 많이 했는데. 내가 오빠를 위해서 계획한 것들 중에 아침 스케줄은 이미 날아갔어.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오후 계획을 다 완수할 수 있어. 오빠도 이 계획 좋다고 했잖아.”


현욱은 순간 ‘그게 어떻게 날 위한 계획이냐. 다 니가 혼자 정한 것 아니냐. 난 사실 그냥 방구석에서 잠이나 실컷 자고 싶단 말이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잔뜩 기대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민영이를 보니, 짜증을 낼 수 없었다. 민영이는 혼자 여행 준비를 하며 시간을 투자했고, 그러면서 더더욱 이번 여행에 기대감을 키워왔던 것이다. 그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현욱은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민영이는 신이 나서 현욱의 손을 끌고 리조트 1층의 식당으로 현욱이를 데려갔다. 민영이는 현욱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해장국 밥을 2인분 시켰다.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는 현욱은 양이 많은 밥이 부담스러웠지만 민영이가 하자는 대로 토 달지 않고 열심히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강원도의 하늘은 맑았다. 그리고 더웠다. 삼복더위가 얼마 전에 끝났고 음력으로 입추라고 해도 날씨는 푹푹 찌는 한여름이었다.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시던 현욱이가 말했다.


“우리 그냥 리조트 안에 수영장이나 들어가자.”


“뭔 소리야? 여기까지 왔는데. 해안 도로도 드라이브하고, 산도 조금 걸어야지. 답답하게 실내 수영장에만 있을 거면 여기까지 뭣하러 와? 그냥 캐리비언베이 가지. 아까부터 정말 왜 그래?”


민영이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현욱은 한 번 더 그냥 좀 쉬자고 말할까 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어디로 가면 돼?”


차에 시동을 걸며 현욱이가 물었다. 그리고 끄윽 트림을 했다. 민영이가 코를 막으며 손을 흔들었다. 현욱이가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민영이는 아침부터 자꾸 고민 끝에 세운 자신의 계획을 무시하고, 안 하던 더러운 짓을 하는 현욱에게 순간 짜증이 났다. 하지만 요새 고생을 해서 까매진 현욱의 얼굴을 보며 짜증을 참고 말했다.


“죽도정. 여기가 예쁘데. 바다도 잘 보이고. 내비게이션에 죽도정 눌러.”


“그래? 가깝대?”


“응, 20분이면 된다는데.”


현욱이가 지도를 보고 내비게이션에 목표를 입력했다.


“아닌데? 40분은 넘겠는데. 여기 맞아?”


“맞아. 그럼 그 정도 거리인가 보지 머.”


“거 좀 확실하게 해. 20분이랑 40분이랑 두배 차이야. 여기 맞아? 도착해서 여기가 아니네 그러면 안돼.”


“아이 정말. 오빠 왜 그래!”


민영이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뭐?”


“요즘에 오빠 힘든 일도 있어서 머리 식히러 온 거잖아. 게다가 오빠 바쁘다고 해서 내가 혼자서 다 알아보고 예약하고, 운전까지 내가 다 했어. 그런데 늦잠으로 아침 계획도 망가뜨리더니 계속 투덜대기나 하고, 내가 확실하게 알아본 건데 맞냐고 의심하면서 확실하냐느니 잔소리나 하고. 내가 가이드야?!!!”


민영이가 속상해서 다다다다 현욱이를 쪼아댔다.


현욱은 민영이에게 많이 미안했다. 사실 현욱은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민영이와 함께 하고 싶었고. 민영이의 이런 마음을 알기에 즐겁게 따라온 것이다. 문제는 정말 피곤해서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안해. 좀 피곤해서 그래. 내가 잘못했어. 여기 죽도정 맞을 거야. 출발할게. 그리고 그다음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데? 스케줄 설명해줘. 잘 기억해둘게.”


“됐어. 안 해! 니 맘대로 해.”


“에이~~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브리핑해주면 잘 듣고 착착!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잘못했쪄요. 아잉 아잉 용서해줘용.”


현욱이가 애교를 부리며 사과를 하자 민영이는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도 바로 화를 풀고 싶지 않아 괜히 틱틱대는 말투로 말했다.


“죽도정 주변 좀 보고 오늘 5일장 열리는 날이니까. 시장 가서 점심 먹고. 낙산사 가서 해지는 거 보고 중앙시장 가서 회 한 접시 사 먹고 서울 갈 거야. 맘에 안 들면 말해. 여기 책 있으니까 다른 데 가고 싶으면 가고.”


민영이는 화가 안 풀리는 척 말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계획을 다 들은 현욱이가 알찬 계획 좋다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했다. 그런데 현욱이 다시 끄윽 트림을 했다.


“아이 정말. 오빠 오늘 왜 그래? 안 하던 트림을 하고?”


“쩝. 나 원래 아침 안 먹는데 오늘 평소와 다르게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봐.”


“소화 안돼?”


“아니야.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현욱이가 억지로 밥을 먹어주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조금 전까지 화를 안 풀려고 하던 민영이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그리고 순간 계획을 세울 때 너무 현욱이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았나 싶어 미안했다.


민영이가 현욱이의 배에 손을 댔다.


“내가 배 만져줄게. 소화 잘 되라고. 미안해. 난 남자들은 당연히 아침에 밥을 먹어야 하는 줄 알았거든. 텔레비전에서 남자들이 아침밥 타령을 많이 하길래 말이야. 나도 아침에는 밥 안 먹어도 상관없는데. 괜히 밥 먹었나 봐. 나름 오빠 생각한 건데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현욱이는 민영이의 따뜻한 손이 배에 닿자 기분이 좋아졌다. 현욱이는 웃으며 민영이의 손을 더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 말고 여기를 만져줘. 그럼 더 좋을 것 같아. 이히히 좋다.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여기 만져주는 거다.”


“아. 뭐야. 호호호호. 만져주는 게 그렇게 좋아? 하하하하 귀엽기는. 알았어. 내가 오늘은 차에 타기만 하면 쪼

물딱 해줄 테니까. 운전 조심해. 어라! 벌써 딱딱해지면 어째? 하루 종일 이렇게 있으면 힘든 거 아냐? 호호호”


“아냐 아냐. 괜찮아. 정말 최고야. 계속해줘. 호호호 그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출발한다. 으흐흐흐.”


두 볼이 상기된 현욱이가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현욱과 민영이가 차에서 내렸다. 피서철이 지난 평일 낮의 관광지는 한적했다. 죽도정까지는 나무 계단이 쭉 만들어져 있었다. 현욱이가 민영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날이 더웠고, 생각보다 계단이 많았다. 둘이 커플룩으로 맞춰 입은 청바지가 땀에 절어 다리를 휘감아 걷는 것이 쉽지 않았다. 민영이는 현욱에게 미안했다. 자기가 늦여름이니 안 덥다고 우겨서 나란히 청바지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욱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민영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정상에 도착했다. 민영이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현욱에게 주었다. 현욱이가 한입에 물병의 반을 마셨다.


"오빠, 미안해. 내가 청바지도 입자고 하고. 이 더위에 여기까지 오자고 해서. 오빠 말대로 그냥 수영장에나 있을 걸 그랬나 봐. 난 그냥 오빠가 바다도 보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난 이게 좋을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닌가 봐. 지난주 내내 이것저것 여행 준비했는데 다 괜히 했나 봐. 오빠만 피곤하게 만들었나 봐. 또 너무 덥고 말이야. 미안해..."


민영이가 우물우물 말하는 것을 내려다보던 현욱이가 씩 웃으며 민영이를 와락 안았다. 현욱의 겨드랑이에서 땀냄새가 났다. 민영이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나 지금 좋은데? 난 좀 게으르잖아. 이것저것 다 귀찮아서 눕고만 싶다고 생각했는데 네 말대로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저 바다 봐. 눈부시고 넓고. 덥긴 하지만 바람이 꽤 시원한 걸. 그리고 무엇보다 너랑 이 좋은 경치를 보고 있잖아. 내가 왜 사는데, 너랑 예쁜 거 보고 맛난 거 먹고, 너 웃는 거 보려고 사는 건데. 정말 잘 왔지. 정말 고마워. 민영아 고맙고 사랑해.”


민영이가 현욱의 겨드랑이에 괜히 장난스레 코를 갖다 대며 킁킁거렸다.


“뭐해. 민망하게.”


현욱이가 팔을 옆구리에 붙이며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이리 와봐. 나 오빠 겨드랑이에 흥분되는 거 같아. 이리 와봐.”


민영이가 현욱이의 팔에 매달리며 웃었다.


“그래 더 마셔라 마셔.”


겨드랑이를 사수하던 현욱이가 어이없어하며 팔을 벌려 민영이를 안았다.


“헤헤헤헤...... 오빠... 사랑해.”


민영이가 현욱의 품에 안겨서 말했다.


“뭐라고?”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은 현욱이 놀라서 물었다.


“사랑한다고.”


민영이가 두 볼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현욱이가 환하게 웃으며 민영이의 두 볼을 잡고 키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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