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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이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현욱은 젖은 머리를 털며 팬티 차림으로 컴퓨터 앞에 있었다. 민영은 벗은 채, 이불속으로 쏙 들어갔다. 바삭거리는 두툼한 이불을 몸에 똘똘 말고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봤다. 2시였다. 민영이는 내일 공부할 스케줄을 머리 속으로 정리했다.


현욱이가 군대 복귀하면 한 일주일은 엄청 빡빡하게 공부해야 할 것 같았다. 하루를 쉬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데 2~3일은 걸리기 때문이다. 민영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머리를 베개에 묻었다.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사랑이 충전됐으니 더 도움이 되겠지, 좋게 생각하자.’ 생각하며 민영이는 잠이 들었다.


잠시 뒤, 현욱은 인터넷에서 재밌는 영상을 발견했다. 낄낄거리며 민영이에게 같이 보자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민영이가 리모컨을 든 채로 잠이 든 것을 발견했다. 현욱은 조용히 일어나 텔레비전을 끄고, 조명을 어둡게 했다. 그리고 민영이 옆에 누워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영이의 눈가에 앉은 다크 서클을 본 현욱은 마음이 아팠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았다면 차라리 민영이는 좀 더 편하게 젊음을 즐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욱은 민영의 눈가에 키스했다. 민영이가 코를 골았다. 현욱이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민영이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다시 컴퓨터 앞에 가서 앉았다.


다음날 아침.


민영이는 학원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현욱에게는 미안했지만 기본적인 공부와 수업은 듣고 데이트를 했다. 이어폰을 끼고, 인강을 듣던 민영은 살며시 자신의 볼을 쓸어내렸다. 순간 오늘따라 유난히 매끄러운 피부를 느껴, 다시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모텔에 비치된 로션 하나만 발랐는데 왜 보들보들하며 피부에 윤기가 나는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혹시... 오랜만에 현욱과 함께 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간밤에 현욱과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따뜻하던 그의 입술과 단단한 가슴이 생각났다. 민영이는 노트북의 스페이스 버튼을 눌러 인강을  정지시켰다. 괜히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다시 영상을 앞으로 돌려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현욱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핸드폰을 보니 이제 겨우 11시였다. 현욱과는 1시에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적어도 2시간만 공부하자. 오후에는 공부를 안 하더라도, 라는 생각으로 버텨보기로 했지만,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왔다. 지은이었다. 민영이는 벨이 두 번째 울리자마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나 좀 만나줘.”


대뜸 나오라는 지은의 말에, 민영이는 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현욱이가 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은이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창수 오빠가 재현이랑 나 썸탄 거 알았어. 나 지금 혼자 술 마시고 있어. 여기로 와주라.”


“기다려 금방 갈게.”


민영은 학원 앞에 기다리던 현욱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창수를 찾아보라고 시킨 다음 지은이를 만나러 갔다.


지은이는 작은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창수 오빠가 재현이를 만났데.”


“왜?”


지은이는 마치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를 하듯이 담담히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어제 현욱이처럼 지은이를 깜짝 놀래키러 동아리방에 갔던 창수는 지은과 재현이 사이좋게 전시회 준비를 하는 것을 멀리서 봤다고 했다. 둘이  스킨십하는 것을 본 것은 아니지만, 단 둘이, 어두운 동아리방에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창수는 뭔가가 있음을  눈치챘다고 한다. 창수는 둘이 헤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재현이를 만나 동아리를 나가라고 명령했고 재현이는 못 나간다고 지은을 좋아한다고 말대꾸를 했다고 한다. 창수는 홧김에 재현이에게 주먹을 날렸고, 재현이도 받아쳤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오늘 아침 재현이 얼굴을 보고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는데. 창수는 어쩐 일인지 전화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재현이는 기회다 싶었는지 이제 자기를 선택하라고  밀어붙이길래 일단 도망 나왔다고 했다.


지은은 지금 뭘 어째야 하는지 몰라 생각나는 데로 민영이를 불러낸 것이다. 지은이는 멍한 표정으로 계속  홀짝홀짝 술만 마시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민영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은이는 그런 민영이가 위로의 말을 고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사실 민영이는 지은이가 조금 부러웠다. 두 남자가 나를 사이에 두고 주먹다짐을 한다는 상황이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현욱 오빠가 있기에 다른 남자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민영이는 모든 상황을 차단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철저히 자기를 가두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지은이가 드라마처럼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왠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부러움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부러워하는 것을 티 낼 수는 없었다. 또 그래 봤자 재현이와 창수였다. 남자들만 보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재빨리 머릿속의 엄한 생각을 털어내고 민영이가 지은이에게 돌직구로 말했다.


“넌 창수 오빠가 좋아? 재현이가 좋아?”


민영이의 단도직입 적인 질문에 지은이는 ‘창수  오빠’라고 생각도 안 하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팔을 올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받쳤다. 술에 취해 눈이 풀려있었다.


“창수 오빠? 확실해? 어떻게 생각도 안 하고 바로 대답해?”


“당연하지. 창수 오빠를 사랑하는 걸.”


“근데 왜 재현이에게 확실하게 말 안 했어?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확실하면 진작 창수 오빠한테도 말하고 상황을 정리했으면 되잖아.”


“나도 몰라. 재현이를 좋아한 건 아닌데, 약간 이런 상황은 좋았었나 봐. 긴장감 들고, 날 예쁘게 봐주고 하는 것들 말이야. 나도 사람이고, 여자인데 좀 이런 상황을 즐기고 싶었던 것 같아. 훌쩍”


지은이가 코를 들어마시는가 싶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왜 울어.”


“억울해서. 내가 손을 잡았어? 데이트를 했어? 억울해. 솔직히 오빠 하던 동아리 이어받아준 거잖아. 내가 지금 약사고시에 매진해야 할 이 시기에, 하던 동아리도 때려 칠 판인데, 오빠 말 한마디로 회장까지 맡아주고 말이야. 근데 지가 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화를 내는 거야? 나쁜 인간 같으니라고. 무슨 지가 액션배우야 뭐야, 주먹질은 또 뭐고. 그리고 연락이 돼야 변명하던 뭘 하던 할 거 아냐. 대뜸 이렇게 사라지고 어쩌자는 거야. 이대로 헤어지진 않겠지? 아 짜증 나. 내가 뭘 했다고, 어쩌라고.”


“에휴.... 넌 정말 도대체 창수 오빠가 어디가 좋냐? 사실 난 너한테 동아리 회장 맡으라고 한 그 순간부터 맘에 안 들었어. 게다가 주먹질까지 하고, 하여간 진중하지 못한 사람이잖아. 나 같으면 조용히 기다려준다고 하는 재현이가 훨씬 더 낫겠다.”


“야! 남의 애인 함부로 말하지 마. 어쨌든 날 사랑하니까 주먹질도 하는 거지. 그리고 울 오빠 진짜 가진 거 많은 사람이거든. 너야 말로 현욱 오빠 볼 것도 하나 없구만.”


“우리 오빠가 어때서? 나한테 엄청 잘해주고, 키도 크고, 잘 생겼고, 머리도 좋고 흠이 없는 사람이야.”


“흥! 결국 잘생겼다 그거구만. 우리 오빠도 잘 생겼거든. 게다가 집안도 부자고. 무엇보다 날 사랑해줬다고.”


“쳇, 키도 작은데.”


“작으면 어때! 잘생겼으면 되지.”


“야. 솔직히 잘생긴 건 아니다. 게다가 다른 남자랑 있었다고 대뜸 의심부터 하는 밴댕이잖아.”


“그건 그래. 젠장. 밴댕이.”


지은은 또 술을 마셨다.


그때 민영에게 카톡이 왔다. [나 현욱인데 지금 창수 찾았어. 너 어디야? 내가 데려 갈게.]


민영은 지은이 몰래 현욱에게 위치를 알려줬다.


현욱이는 창수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데려왔다. 지은과 창수는 서로 눈도 안 마주치고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민영이와 현욱이는 억지로 대화를 시켜보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둘은 더욱 입을  다물뿐이었다. 결국 민영이와 현욱이는 둘을 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집을  빠져나오자마자, 현욱이는 민영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제도 집에 안 갔으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


“들어가기 싫은데.”


민영이가 괜히 입을 삐쭉이며 귀여운  척하며 말했다.


“나도 보내기 싫지만, 오늘은 들어가야지.”


현욱이가 남는 손으로 민영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민영이 현욱에게 말했다.


“잘 화해하겠지?”


“그러겠지. 창수가 지은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근데 정말 이번에는 너무 소란스럽게 싸웠다.”


“그러게 우린 이렇게 잘 지내는데, 그치?”


현욱이 민영이의 잡은 손을 들어 손등에 뽀뽀했다.


“헤헤.”


민영이가 현욱의 허리를 감싸며 웃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넷은 전철역에 모였다. 민영이와 현욱은 창수 커플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에 안심했다. 창수와 현욱은 전철을 타고 군대로 떠났다. 각자의 남자친구를 보낸 민영과 지은은 커피숍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지은이가 폭탄을 던지듯 말했다.


“나 휴학해.”


“휴학? 다음 학기에 휴학한다고?”


“아니 내일. 아직 개강한지 얼마  안 되어서 중도 휴학할 수 있대. 아니면, 질병 휴학으로 알아보던지 암튼 그냥 남은 학기 버릴 거야.”


“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창수 오빠가 휴학하래, 휴학하고 아는 약국에서 알바하면서 기다리래. 자기 제대하면 그때 같이 학교 다니래. 불안해서  안 되겠다고.”


“알바? 무슨 말이야?”


“학교 앞 사거리의 5층짜리 병원 건물 알아? 김성모 내과랑 이비인후과랑 있는 건물 말이야. 바로 김성모가 창수 오빠 아버님이셔. 그리고 그 건물 주인이고.

어제 연락 안 되는 동안 오빠가 아버지 붙잡고 졸랐데, 여자 친구 잡아야 한다고. 아버지 눈앞에서 지켜봐 달라고, 안 그러면 자기 탈영한다고 그랬데. 그래서 아버지가 1층 약국에 알바 자리 넣어주기로 하셨데. 그리고 나 동아리 그만두기로 했어. 오빠가 괜한 일 시켜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어."


“그래서, 휴학까지 하고 남자친구 기다린다는 거야? 고시도 미루고? 너네 부모님은 뭐라시는데?”


“나도 좀 황당했는데, 오빠가 어제 바로 우리 집에 가자고 하더라. 얼결에 집에 데려갔는데, 우리 집이야... 부잣집 사위만 얻을 수 있다면 좋다는 주의니까. 게다가 알바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을 거고.”


민영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 정말 그러고 싶어? 공부도 때가 있는데 그러다 약사 못 되면 어쩌려고 그래. 게다가 휴학이 흔하다고 해도 함부로 할 건 아니잖아. 그리고 매일 시아버지를 만나는 식이잖아.”


“난 매일 아버님 만나는 건 좋아. 그렇게 오빠 꽉 잡으면 더 좋지 머. 게다가 생각해보니까. 내가 휴학하면 졸업을 같이 하거든. 오빠가 학고 맞아서 한 학기 더 다녀야 하니까.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아무튼 이렇게 흔들리지만 않으면 좋지 싶어.”


“하지만......”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 친구 식구와 얽히는 모양새도, 또 대뜸 휴학까지 진행하는 지은이가 이해되지 않은 민영이는 좀 더 지은이를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 말을 해봤자 이미 당사자가 결정을 내린 것을 어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민영이는 입을 다물었다.


민영이는 서둘러 지은과 헤어져 학원에 갔다. 하지만 오늘도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민영이는 결국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다.


“일찍 왔네.”


대학 졸업반인 언니 민주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민영이가 그 옆에 털썩 앉았다.


“언니 지은이가 휴학한데.”


“왜?”


“지은이 남자친구가 학교 다니면 바람 필 거 같다고, 휴학하라고 했데, 대신 남자 친구 아빠가 운영하는 병원 옆에 약국에 알바로 취업하라고 했데. 지은이가 맨날 남자친구 부자라고 자랑하더니, 진짜 부자긴 한가 봐. 우리 학교 앞에 병원 건물 기억나? 사거리에 있는 8층짜리 건물. 그 건물주래. 의사고. 암튼 남자친구가 하란다고 지은이 오늘 휴학계 낸데. 참 별일이 다 있어.”


“우와, 너 배 아프겠다.”


“왜? 뭐가? 난 이해가 안 가는데? 휴학까지 하고, 매일 시댁 가는 거가 뭐가 좋아? 난 절대 못해."


“너 바보냐? 그 정도 재산이면 할 만 하지. 몇 년 기다렸다 결혼하면 그 재산 다 지은이 거 되는 거고, 약사고시 천천히 패스하면 약국도  차려줄지 누가 알아. 할만하지.”


“헐~, 근데 헤어지면?”


“헤어지면 뭐? 그래 봤자 1~2년 휴학한 거, 누가 뭐래? 요즘 다들 하는 휴학인데. 거기다 어차피 약사 자격증만 따면 되잖아. 그리고 그렇게까지 서로 얽히는데 헤어지겠냐? 사실 지은이네 구멍가게 하다 망하고, 하다 망하고 그런 거 아냐? 그런 집에서 거의 재벌 수준의 남자를 잡을 기회를 왜 마다해?”


언니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말을 하다 보니 본인이 더 흥분한 것 같았다. 언니 말을 들으면 지은이가 부잣집 마나님이 되는 건 기정사실인 것 같았다.


민영이는 괜히 짜증 나서 발을 비벼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발가락으로 양말을 집어, 발로 거실 끝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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