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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다. 민영은 조심히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실이 밝았기 때문이다. 민영이는 부모님께 혼날 생각에 인상을 쓰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거실에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아빠. 안 주무셨어요. 다녀왔습니다.”


민영이가 술 냄새를 풍길까 두려움에 멀찌감치 서서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흠... 민영아, 부엌에 가서 물 한잔 마시고, 이리 와서 앉아봐.”


아버지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민영이는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간만에 혼날 것 같은 두려움에 아빠의 눈치를 보며, 멍청하게 서 있었다.


“어서! 물 한잔 마시고 정신 차리고 이리 와서 앉아.”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민영이는 어색한 두려움에 조용히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화장실에도 들러 양치와 세수도 하고 나와 아버지로부터 떨어진 소파 구석에 앉았다.


민영이가 앉자,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끄고 ‘흐음’ 헛기침을 하시고는 민영이를 바라보았다.


“민영아. 너 3학년 된 거 맞지? 이제 놀만큼 놀았으니 CPA시험 준비해라.”


민영이가 놀라서 아빠를 보았다.


“저요? CPA요? 아빠, 난 공부 잘 못하는데요. 게다가 그쪽은 나랑 상관없는 분야인데요.”


“알아. 그래도 시험 준비해.”


“아빠, 나한테 왜 그러세요? 오늘 늦게 들어온 거 잘못했어요.”


“술 먹고 들어왔다고 혼내는 거 아니야. 네가 가야 할 길을 말하는 것뿐이야.


너 대학 졸업하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무슨 일이든  취직할 것 아니냐. 그러려면 아빠 회사 들어와야지 남의 회사 들어갈 필요 없잖아. 또 우리 회사 들어오려면 회계사 자격증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말이다. 또 그래야 니가 아빠 회사 물려받을 거고,


니 언니는 솔직히 공부나 사업 머리가 아니잖아. 피아노나 치다가 시집이나 가면 끝이고, 너 밖에 없다.


암튼 이제는 너도 놀만큼 놀았고,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까. 슬슬 회계사 시험 준비해."


“.... 아빠. 전 그런 거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요. 그리고 자신도 없구요. 나 대학도 정말 힘들게 들어갔는데요. 그 시험 많이 어렵잖아요.”


민영이가 술 냄새 날까 조심하며 말했다.


“뭐... 솔직하게 말하면 붙는 것을 목표로 하겠지만 말이야. 정말 하다 하다 안돼서 떨어질 수도 있겠지. 그래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시험공부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을 거니까. 최악의 상황에는 준비한 것만으로도 회사 운영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으니까.

하지만 넌 열심히 하면 충분히 합격할 거야. 난 고3 때 너 보면서 느꼈어. 솔직히 니가 지금 다니는 대학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도 못했거든. 그런데 막판 공부로 지금 대학에도 갔잖아. 너는 시험에 강한 아이야. 난 그때부터 더욱 내 딸을 믿었다."


민영이는 순간 현욱 오빠가 생각이 났다.


“아빠, 회계사 되면 좋아요? 뭐가 좋아요?”


“회계사 좋지. 바쁘긴 하다만, 사실 모든 직장인들이 다 바빠. 똑같이 바쁜데 회계사는 돈을 더 많이 벌잖아. 아무리 회계사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짜 전문직이니 돈이나 지위나 어디 가서 꿇리지 않지. 게다가 자격증 자체가 쓰임이 많으니까, 설령 니가 아빠 밑에 들어오는 게 싫다면 공무원이나 대기업 같은 데 들어가려고 하면 훨씬 편하게 들어갈 수 있지. 또 자격증 자체가 부자들 상대하는 거라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또 그들도 대접해주고.

아빠가 가난한 집 출신인 거 알지? 그래도 말이야, 이 자격증 하나로 내가 대접받고, 니 엄마 같은 과분한 사람하고 살고 있지 않니. 그러니까 나는 내 자식도 나와 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는 거야. 아무튼 아무리 예전보다 똥값이라고 해도, 시험 쳐서 들어간 것은 아무도 무시 못해. 당당하게 살 수 있어.”


자부심 넘치는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말들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 악물고 공부해서, 자격증 따고 성공했다는 이야기... 예전에는 구닥다리 이야기로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저 이야기들이 왠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진지하게 취업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예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더구나 오늘 현욱 오빠와의 미래에 대한 지은이의 충고까지 들어서 그런가 싶었다.  그중에서도 자격증만으로 가난한 아빠가 부자 엄마와 결혼했다는 그 부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고개를 숙이고 두 볼을 빵빵하게 만들며 뭔가 생각하는 민영이의 모습이 어린애 같았다.  아버지는 그런 민영이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오늘은 들어가서 자라. 내일 술 깨고 다시 이야기 하자.”


아빠의 말에 민영이는 정신을 차리고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민영이는 침대가 아닌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검색창을 띄워서 ‘회계사’를 검색했다. 공부 방법, 사회적 대우, 그리고 연봉 등을 꼼꼼히 검색했다.


아침이 밝았을 때, 민영이는 인터넷으로 제일 큰 회계사 학원에 상담 신청을 남기고 있었다.






한 달 전, 민영이는 그렇게,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편하게 지내던 생활을 청산하고,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며, 모든 지원을 약속해주셨다. 민영이는 태어나서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아버지를 본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민영이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와 현욱 오빠를 위해 꼭 합격하리라 다짐했었다.

시험공부 한 달 동안 민영이는 표정부터 옷차림까지 많이 변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열중한 것은 처음이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학교 수업을 받으며, 학원까지 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단 체력이 많이 달렸다. 그래도 변한 민영의 모습에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는 것 하나는 마음이 참 편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잠이 들려던 민영은 퍼뜩 눈을 떴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으로 현욱의 자대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인터넷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빠, 오늘은  시험공부한지 한 달이 됐어. 학원 기초 특강 1회가 끝났고. 이제야 겨우 과목별로 무얼 배우는지 알 것 같아. 워낙 모르던 분야라지만 정말 느리지. 그래도 이제 수험생이란 신분에 익숙해진 것 같아. 다행이지. 

오빠 제대와 동시에 합격을 목표로 시작했는데. 자신이 없어졌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아. 하지만 꼭 합격은 할 거야.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든든하게 만들어줄게.

이번 주말에는 토익 특강이 있어서, 면회를 못 갈 것 같아. 매달, 매주 면회 가려고 했는데, 바로 수험생이 돼서 벌써부터 못 가서 미안해. 다음 달에 휴가 나온다고 했지? 그때 달달한 시간 많이 보내자. 건강하게 잘 있어. 사랑해]


순식간에 편지를 써내려 간 민영은 다 쓰자마자 훑어보지도 않고 편지를 전송했다. 인터넷 편지를 전송하고 민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처음 훈련소에 편지를 쓸 때는 몇 시간씩 앉아서 직접 손 편지도 쓰는 등, 정성을 가득 담았었다. 하지만 자대 배치 이후, 매일 핸드폰으로 편지를 쓰다 보니, 요즘엔 조금 긴 카톡 메시지를 보내는 기분이었다. 답이 많이 늦게 오는 카톡 말이다. 그나마 시험 준비를 시작한 후로는 귀찮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의무감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사실 만나는 것도 그렇다. 처음 100일 휴가인 위로 휴가 받을 때까지는 정말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후,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자대 배치를 받아서 그런지, 주말마다 면회 가서  데이트하고, 휴가도 빨리 나와서 멀리 떨어진 군인과 사귀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냥 다른 대학에 다니는 남친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회계사 공부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달간 얼굴을 보지 못했다. 드디어 현욱은 편지로 면회도 안 오고, 전화 통화도 잘 안된다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에 매진하는 지금의 민영이는 사실 3주 뒤에 있는 현욱의 3박 4일 휴가도 조금 부담스러워진 것이 사실이다.


민영이는 본인에겐 짧은 시간이었지만 군대에 있는 현욱에겐 긴 시간이란 것을 잘 알기에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둘이 오랫동안 사랑하고, 결혼도 하려면 지금 이 자격증을 따는 것만이 민영이가 생각해낸 유일한 방법이니까.


민영은 다시 힘겹게 눈을 뜨고, 지은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제발 지은이가 이미 잠들었기를 바라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메시지 봤어. 자?]


이대로 잠이 들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벨이 울렸다. 민영은 침대에 누운 채, 전화를 받았다.


“민영아. 나야.”


“응, 너 아직 안 잤어? 2시가 다 됐는데.”


“응...”


“너 술 마셨어?”


“응.”


“왜?”


“나 창수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


“너 술 마셨어?”


“응 한 잔 했어. 너무 외롭고 힘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 그래. 너 답지 않게.”


“내가 뭐. 나 다운 거?  그래 나 맨날 잘난  척한다. 그래도 흐흑... 흐흑. 그래도 힘들다구. 사실 나  고백받았어.”


“고백? 누구?”


“재현이.”


“재현이? 총무? 걔가 너 좋데?”


“그래. 재현이. 나도 너처럼  고백받았다. 젠장.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동아리 때문에 안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보자니 어색하고.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몇 번이나 느낌이 요상했어.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동아리 행사가 많으니까 쉽지 않았어. 그 와중에 단 둘이 할 일도 많아서 짜증 났었는데. 오늘은 아예 직접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더라.

거절을 하긴 했지만,..... 기다릴 거라고 한 번에 끝날 고백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어째야 하냐......"


“안 보면 되잖아.”


“그게 재현이도 동아리 총무고 난 회장이잖아. 어떻게 안 봐. 동아리는 지켜야 하고...... 그러려면 내가 동아리 회장을 버려야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되잖아.”


“......”


민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보고  어쩌라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 내서 말할 수는 없었다. 창수 선배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된 지은이는 동아리의 핵심인물이다. 지은이가 이대로 사라지면 동아리도 위태로워질게 뻔했고 그러면 지은과 창수는 바가지로 욕을 먹을 것이다. 하지만 창수를 좋아한다면, 창수에게 말하고 차라리 동아리를 그만두는 정답이 있었다. 민영이었다면, 썸을 타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예 그 집단에 발을 뺐을 것이다. 민영이는 강하게 말을 하기로 했다.


“창수 오빠한테 솔직히 말하면  안 돼?”


“군대에 있는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기도 싫고, 오해해서 차일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오빠 성격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짐작이 안돼서 말을  못 하겠어.”


“나라면 그래도  말할 거야. 말하고 이런 상황이 다시 오는 거 싫으니 동아리  그만둔다고 말할 거야. 만약 내가 딴 남자에게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지은이는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은아, 주말에 창수 오빠한테 면회나 가.”


“이번 주말엔 출사 있어. 졸업한 선배들도 오는 자리야. 너야말로 주말에 사진 찍으러 와야 해.”


“난 못가. 주말에 토익 공부해야 해. 그리고 지금  말할게, 앞으로도 동아리 참석은 힘들 것 같아.”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민영이의 말에 지은이는 놀란 눈치였다. ‘항상 우유부단하고 좋은 것만  찾아다니던 민영이가 언제 이렇게 똑 부러지게 거절하는 성격으로 바뀐 거지‘하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알았어. 시험 잘 봐. 당연히 공부가 먼저지. 그래도 나를 잊으면  안 돼.”


“응, 이해해줘서 고마워.”


“됐어. 어서 자.”


민영이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여름 아침 7시의 빈 강의실은 어제 하루 종일  들러붙었던 땀냄새를 스멀스멀 뱉어내고 있는지 쾌쾌한 냄새가 났다. 민영은 암기노트를 들고 오늘 스터디할 부분을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그때 스터디 멤버가 음료수를 들고 들어왔다. 3일 전에 들어온 새 멤버였다. 얼마 전 제대한 복학생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민영의 책상에 음료수를 놓아주었다.


“이거 마셔요. 내가 먼저 올 줄 알았는데, 민영이가 1등이네. 제일 어린데, 제일 열심히 하고 보기 좋아요. 역시 젊어서 그런가. 후훗. 오늘 스터디 끝나고 밥 같이 먹을래? 다들 아침도 안 먹고 오는데.”


남자는 민영이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민영은 책상 귀퉁이에 놓인 레쓰비 캔을 슬쩍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책상을 민영이에게 조금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있다고 했지요? 휴가는 자주 나와? 군대 간지 얼마  안 됐는대 외롭지 않아?”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고, 다른 멤버들이 들어왔다. 6명의 멤버가 모여 어제 공부한 것들을 점검하고 쪽지 시험을 보았다. 한 시간의 스터디가 끝나자 민영은 부리나케 가방을 싸서 제일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와 1교시 수업을 들으러 뛰어갔다. 가는 길에 민영은 스터디 반장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스터디 그만두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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